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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박영하 을지재단 설립자 10주기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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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2023.05.08
  • 조회수1338

'환자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박영하 을지재단 설립자 10주기 추모


 

을지재단을 설립한 범석 박영하(1927~2013) 박사 타계한 지 10주기를 맞았다. 그는 한국전쟁을 맞아 '피란' 대신 육군병원에 스스로 찾아가 최전방 부상병을 돌본 의사, 자원입대해 1956년 7월 중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6년간 야전병원을 지킨 군의관이었다. 이때부터 환자가 필요한 곳에서 의술(醫術)을 실현했다. 1981년 대전 목동에 대형종합병원을 건립하고 같은 자리에 의과대학을 출범시켰으며, 2001년 금산을지병원 그리고 2004년 대전 둔산 을지대학교병원 개원까지 대전 의료지방화 시대를 예견한 박영하의 뚝심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국립대전현충원 사회공헌자묘역에 영면한 박영하 박사의 생애를 돌아본다. <편집자주>

 

 

 

▲야전병원 지킨 민간인 의사

서울대병원 산부인과학 교실의 의사로서 정식 근무를 시작한 을지재단 설립자 박영하 박사는 그해 한국전쟁을 맞아 남쪽으로 피란 대신 의료장비와 약품을 챙겨 부상병과 피란민 치료를 시작했다. 전쟁 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서울대 의과대학생들의 의용군이 조직됐다. 박영하 박사는 의용군 일원으로서 이병윤과 함께 수원에 주둔하던 수도육군병원을 찾아가 부상병들을 돌봤고, 총에 맞았거나 폭탄의 파편으로 부상 입은 우리 국군에게 응급수술을 하고 어느 정도 상태가 안정되면 더 큰 병원으로 후송했다. 남침에 밀려 야전병원이 급히 후퇴할 때도 박영하는 대전까지 내려와 제2육군병원에서 부상병을 계속 살폈다. 그는 현역 군인도 아니었고 서울대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신참 의사이었다. 의용군을 조직해 전선에 뛰어든 것이며 전쟁터에서 부상병 치료를 도와 대전까지 내려온 것은 박영하를 비롯한 이들이 유일했다. 참전하지 않았던 동료 의사들은 민간병원에서 공부를 계속할 때 군인도 아닌 신분에서 또다시 남하하는 전선을 따라 부산 기장의 야전병원을 지켰다. 그는 자발적으로 군에 들어와 봉사하는 민간인 의사를 군의관으로 임관하는 제도에 응시해 중위 계급장을 부여받고 군의관으로 임관해 본격적으로 복무를 시작해 1956년 7월 중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대전 63육군병원 외과부장, 속초 제1외병원에서 근무했다. 평양을 수복하는 작전 중에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한 평양 제27육군병원 창설 요원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합류했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이른바 1·4후퇴 때 기간병과 간호 장교들을 인솔해 성공적으로 남하했다. 박영하 박사와 부부의 연을 맺은 을지재단 전증희 명예회장도 서구식 간호교육을 받아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간호장교로서 선구자이며, 초임지 대전 제2육군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해 강릉 59육군병원 간호부장 때 휴전을 맞아 대위로 예편했다.

박준영(산부인과 전문의) 을지재단 회장은 "박영하 설립자께서는 해방과 함께 맨몸으로 월남하여 서울대학교에서 고학하던 중, 나라의 위기를 외면치 않고 자원입대로 참전하고, 휴전 후에도 바로 제대하여 개원하지 않고 3년간을 더 군의관으로 복무하셨다"라고 회상했다.




▲개인병원을 공익재단에 헌사
군의관 임관 6년 만에 사회로 돌아온 박영하 박사는 서울대 의과대학 산부인과교실로 복귀했고, 1959년 11월 서울 중구 을지로에 '박영하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일본식과 한옥을 겸한 주택을 개조한 병원이었는데 2층에는 온돌방으로 된 5개의 입원실을 두고 1층은 외래와 진료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가족들의 거주공간을 함께 두었다. 박영하 박사는 이곳에서 24시간 환자를 돌봤는데, 병원비를 낼 형편이 안 되는 환자가 고마운 마음으로 대신 갖다 준 꿩이나 닭이 병원 옥상에서 이른 아침을 깨우곤 했다. 개원 8년 만에 종합병원으로 승격하고 병원의 이름도 '을지병원'으로 개칭했다. 박영하는 1967년 3월 '재단법인 을지병원 유지재단'이라는 공익재단을 출범하고, 을지병원이 사유재산이 아니라 사회에 환원된 공익법인체임을 공식화했다. 의료법인 제도가 1973년 처음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이보다 앞서 개인 소유의 종합병원을 재단의 사회 공익화한 것으로써, 의료를 사회적 복지사업으로 여겼던 박영하의 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1983년 대전을지병원을 교육기관인 학교법인 을지학원으로 무상 출연해 의료인 후학양성의 기반을 마련했고, 1997년에는 학교법인 을지학원과 의료법인 을지병원 등에 개인 재산 100억 원을 출연했다. 의료공익화를 평생의 원칙으로 삼았던 박영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차남 박준영을 비롯한 유가족들은 172억여 원의 재산 모두를 을지학원과 병원에 기부함으로써 그 정신을 이어나갔다. 이때 개인 재산의 출연으로 대전 둔산 을지대병원 건립을 추진할 수 있었다. 박영하 박사는 1998년 5월 한국상록회로부터 '인간 상록수'에 선정됐고, 1999년 4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2008년 4월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각각 수훈했다.
황인택 대전 을지대의료원장은 "세월이 빠른지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순간도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박영하 설립자의 가르침은 뚜렷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다"라며 "대전 을지대학교병원이 벌써 개원 43주년째를 맞이하고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생각하면 항상 든든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환자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
1981년 4월 23일 대전 중구 목동에 17개 진료과에 218병상을 갖춘 대전을지병원이 개원했다. 대형 종합병원들이 서울 강남 개발을 쫓아 강남 진출에 혈안이 되었던 때이자, 1970년대 후반까지 인구 100만 명이 채 안 되던 대전에서 파격적인 도전을 단행한 것이다. 당시 대전에서는 충남대병원이 개원한 지 9년째 되던 해였고, 대전성모병원이 종합병원 인가를 받은 지 1년째 되던 척박한 환경이었다. 이미 1967년 공익법인의 출범으로 의료복지 구현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박영하 박사는 지방의 열악한 의료 환경 개선을 위해 강남보다는 의료 취약지구를 선택했다.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은 "병원이 잘되는 곳이 아니라 환자가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박영하 설립자의 신념이었다"면서 "그것이 을지를 강남 진출이 아닌 대전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박영하 박사는 판단은 신중하되 결정 후에는 무섭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배재학원의 부지를 인수한 후에 곧바로 설계에 착수하고 착공 1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대전을지병원은 진료 측면에서 착실하게 입지를 다져나갔다. 1983년 암치료센터를 개원한 데 이어 1985년 2월에는 대전지역 최초로 13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심장병 개심술에 성공해 중부권 유일하게 대동맥 수술을 시행하는 병원으로 발전했다. 또 2001년 8월에는 충남 금산에 종합병원을 개원해 의료 소외지구 국민 보건향상에 이바지 했다. 1996년 의과대학 설립을 승인 받은 4대 대학 중 을지대의과대학만이 '의료취약지구 내 종합병원 건립'이라는 약속을 유일하게 이행함으로써 그 의미가 더욱 빛났다.

▲도전했을 때 성장하는 을지
을지재단은 앞서 1972년 의과대학 설립 신청을 제기할 정도로 학교설립에 열망이 컸다. 박영하 박사의 선친 박봉조(1900~1952) 선생은 '의사로서 성공 후엔 반드시 작은 고등학교라도 설립해 육영사업을 해달라'는 유훈을 아들에게 남겼다. 1983년 서울보건전문대학을 전격 인수한 을지재단은 1996년 12월 대전을지병원에 의과대학 설립인가를 정식으로 획득했다. 이에따라 대전을지병원은 1996년 학교법인의 자산으로 무상 기부되고, 1997년 1월에는 을지대학 부속병원으로 전환됐다. 2004년 대전을지대병원은 또 한 번 도전했고 큰 변화를 꾀했다. 대전의 행정과 경제·문화·교통 중심지인 둔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지하 3층~지상 16층 연면적 9만9000여 ㎡(3만여 평)에 총 1053개 병상을 갖추고 문을 열었다. 당시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의 의료법인 을지병원(현 노원을지대병원)은 을지의대 설립과 둔산병원 건립 자금의 70% 이상에 해당하는 총 662억 원을 무상으로 기부했다. 대전과 경기도 성남에 캠퍼스를 둔 을지대와 대전·노원을지대병원 등의 산하기관을 가진 을지재단은 경기도 의정부에 또 하나의 을지대병원을 개원하고 캠퍼스를 준공했다. 지역과 함께 성장하며 새로운 분야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환자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 마련하는 을지 역사의 연장선에서다.
국내 의학발전과 인재양성에 평생을 헌신해 온 박영하는 2013년 5월 7일 영면했다. 향년 87세였다. '의료기관의 본래 사명은 환자를 위해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봉사기관'이라며 의료기관의 근간을 바로 세웠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거목으로 이름을 남긴 박영하는 국가와 사회발전에 공헌한 기여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됐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